아픔의 현재성이 나를 살린다.

입덧을 하는 아내의 모습은 그러나 완전히 실감되지 않는다.
아내 옆에 존재하며 실감하는 아내를 더듬으며 공감할 뿐이다.
요즈음 아내의 심해지는 입덧의 고통은 아내의 온 몸과 하루의 전부를 지배한다.
어찌 아픔을, 어찌 고통을 그들의 온 몸을 떠 안고 있는 사람 앞에서
아픔의 경중을 고통의 경중을 논할 수 있겠는가.
암의 아픔보다 체한 사람의 아픔이 적다고 말 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아픔의 현재성에서 벗어난 사람일 것이다.
아픔의 현재성 가운데 있는 사람은 온전히 그 아픔과 고통에 온 몸을 내어주고 있을 뿐이다.

과거에 아픔을 겪은 사람도 아픔의 과거는 가지고 있지만 현재성이 없으므로
쉽게 말 할 수 있다.
아픔을 겪어보지 못했지만, 듣거나 지켜본 사람도 간접경험은 있으나 현재성이 없으므로
쉽게 말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쉽게 말 해 주었다.
"그것이 원래 그런 것이야."
"다 그 과정을 겪는 거야"
"아무리 아파도 죽지 않아"
덤덤한 표정으로 때론 웃으며 말해주는 그들의 현재성 없음에 위로가 되지 않았다.
결국에 모든 말이 쉬운 말로 변해버렸다.

너무 아파하는 아내와 병원엘 갔다.
지푸라기를 잡아보자는 심정으로 병원엘 갔다.
그리고 그 병원냄새 지독한 곳에서 한 의사가
아픔의 현재성에 동참해 걸어들어왔다.
그 의사는 남자이고, 임신을 해보지도 않았을 터이고, 입덧 또한 경험치 못한
아픔의 과거도 추억도 없을 터인데
그는 아픔의 현재성에 동참해 들어왔다.
그리고 근심스래 그렇게 말했다.
"불상해서 어떻게 하나......"
8.18.월